밥 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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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밥 펠러는 1930~1950년대 활약한 미국의 야구 선수로, 특히 강속구를 주무기로 '불덩이 투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193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하여 18시즌 동안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다승왕 6회, 탈삼진왕 7회, 평균자책점 1회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선수 생활의 공백기를 겪었지만, 복귀 후에도 뛰어난 기량을 유지하며 명성을 떨쳤다. 1962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은퇴 후에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2010년 백혈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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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펠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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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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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투수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출생일 | 1918년 11월 3일 |
출생지 | 아이오와주 밴미터 |
사망일 | 2010년 12월 15일 |
사망지 |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36년 7월 19일 |
데뷔팀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일 | 1956년 9월 30일 |
최종팀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
통계 | |
리그 | MLB |
승패 기록 | 266승 162패 |
평균 자책점 | 3.25 |
탈삼진 | 2,581개 |
소속 팀 | |
선수 경력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36–1941, 1945–1956)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 8회 (1938, 1939–1941, 1946–1948, 1950) |
월드 시리즈 우승 | 1948 |
트리플 크라운 | 1940년 |
최다 승리 | 6회 (1939–1941, 1946–1947, 1951) |
평균 자책점 1위 | 1940년 |
탈삼진 1위 | 7회 (1938–1941, 1946–1948) |
노히트 | 3회 (1940, 1946, 1951) |
영구 결번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No. 19 |
명예의 전당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헌액 | |
종류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년도 | 1962 |
득표율 | 93.8% (첫 투표) |
군 복무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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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국가 | 미국 |
군종 | 미국 해군 |
복무 기간 | 1941–1945년 |
계급 | 상사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대서양 전투 태평양 전쟁 |
개인 정보 | |
배우자 | 버지니아 윈터 (1943년 결혼, 1971년 이혼) 앤 소프 (1974년 결혼) |
2. 생애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룸)
2. 1. 유년 시절
미국 아이오와주의 농촌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평범한 농부였지만 열성적인 야구 팬으로, 아들 밥 펠러가 야구선수가 될 수 있도록 농장 한편에 투수 마운드를 만들어 주었고, 나중에는 펜스와 조명 시설까지 갖춘 야구장을 직접 설치해 주었다. 펠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야구를 하며 성장했다.12살 때 펠러는 빠른 직구를 앞세워 고교 팀과 세미프로 팀을 상대로 7경기에 등판하여 5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는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세미프로 팀을 상대로 21개의 삼진을 잡아낸 바로 다음 경기에서는 고교 팀을 상대로 23개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메이저 리그 구단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로 유격수나 외야수로 뛰었으며, 전설적인 타자 로저스 혼스비의 타격 자세를 따라 하기도 했다.[2] 15세 때, 오크뷰 팀의 선발 투수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본격적으로 투수를 시작했고, 동시에 아메리칸 리전 야구에서도 계속 활동했다. 이 시기 그의 공을 받은 포수는 훗날 1939년 하이즈만 트로피를 수상하고 대학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나일 키닉이었다.[2]
반 미터 고등학교(Van Meter High School)에 다니면서 학교 야구팀의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동시에 아메리칸 아마추어 야구 회의(American Amateur Baseball Congress) 소속의 파머스 유니온 팀에서도 뛰었는데, 한 시즌에 19승 4패를 기록하기도 했다.[3][4] 야구 외에도 고등학교 농구팀에서 센터로 뛰었다.[2] 16세가 되자 그의 패스트볼은 전문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들은 그를 보기 위해 연례 전국 야구 토너먼트가 열리는 데이턴으로 몰려들었다. 여러 구단에서 계약 제안을 했지만, 그는 이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2]

1936년, 펠러는 인디언스의 스카우트 사이 슬라프니카와 계약했는데, 계약금은 단 1USD와 사인이 담긴 야구공이었다.[2] 펠러를 스카우트한 슬라프니카는 훗날 "이 아이는 꼭 영입해야 할 투수였다. 특별한 존재라는 걸 알았다. 그의 직구는 빠르고 흐릿했으며, 일직선으로 날아가지 않고 흔들리며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가 영리하고 사자 같은 심장을 가졌다는 것은 그때는 몰랐지만,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팔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고 회상했다.[5] 펠러는 고등학교 학기를 마친 뒤 인디언스 산하의 파고-무어헤드 트윈스 팀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2]
하지만 당시 메이저 리그 규정상 아마추어 선수와의 계약은 마이너 리그 팀만 가능했다. 인디언스 구단은 펠러를 마이너 리그 팀(파고-무어헤드에서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로 소속 변경)에 잠시 두었다가, 팜 클럽을 거치지 않고 외야수 토미 헨리치와 함께 곧바로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올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이 문제가 불거지자 커미셔너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가 3개월간의 조사를 벌였다. 랜디스는 인디언스 구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펠러와 헨리치 모두에게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부여했으며, 구단에는 7500USD의 벌금을 부과했다.[5] 하지만 랜디스는 펠러와 그의 아버지가 클리블랜드에서 뛰기를 강력히 원하며 법정 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펠러가 인디언스에 남는 것을 최종적으로 허용했다.[6] (헨리치는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스포츠 칼럼니스트 조 윌리엄스는 이 사건에 대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7500USD로 50만달러 상당의 홍보 효과를 얻었다"고 평하기도 했다.[7]
이후 펠러는 1936년 7월 19일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며 만 17세의 나이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2. 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입단
193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단장은 당시 16세 고등학생이었던 밥 펠러의 강속구 소문을 듣고 직접 투구를 확인한 뒤 즉시 계약을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메이저 리그 규정상 고등학생과의 계약은 금지되어 있었다. 클리블랜드 구단은 마이너리그 구단 지원 등을 통해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의 예외 인정을 받았고, 이후 다른 구단의 항의 등 논란이 있었으나 벌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이 최종 승인되었다.펠러는 계약 조건으로 1USD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단장의 사인볼을 요구하여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그의 부모님이 아이오와주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펠러 자신이 금전에 큰 욕심이 없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펠러가 이때 받은 1달러짜리 수표는 현재 그의 고향에 위치한 밥 펠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펠러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직접 농지에 야구장을 만들고 조명 시설까지 설치할 정도로 열성적인 야구 팬이었으며, 이러한 아버지의 지원은 펠러가 야구 선수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2. 2. 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활약
1936년 당시 17세의 고등학생 신분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한 펠러는 계약 과정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다. 당시 메이저 리그는 고등학생과의 계약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구단은 펠러를 마이너 팀 소속으로 숨기려 했으나 곧 발각되었다. 다른 구단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커미셔너가 개입하여 인디언스가 벌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이 최종 승인되었다. 입단 계약금은 단 1달러였는데, 부모님이 농장을 소유하여 비교적 유복했기에 펠러 본인은 금전에 큰 관심이 없었다고 전해진다.같은 해 스프링캠프에서 펠러는 빠른 강속구를 선보이며 자니 마이즈, 조 매드윅 등이 포진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3이닝 동안 8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36년 8월 23일,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한 메이저 리그 데뷔전에서는 15탈삼진을 기록했고, 9월 13일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 전에서는 당시 디지 딘이 보유하고 있던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17개)과 타이를 이루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37년에는 간간히 선발로 등판하여 9승(7선발승)을 거두었다. 1938년, 만 19세의 나이로 풀타임 선발 투수가 된 펠러는 17승 11패, 평균자책점 4.08과 함께 240탈삼진을 기록하며 첫 아메리칸 리그 탈삼진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는 이후 7년 연속 탈삼진왕 기록의 시작이었다. 시즌 마지막 날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한 경기 18탈삼진이라는 메이저 리그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해 무려 208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시즌 200볼넷 이상을 기록한 투수가 되는 등 제구력에 약점을 보이기도 했으나, 이후 제구력 향상에 집중하며 점차 안정감을 찾아갔다.
1939년에는 24승(23선발승) 9패, 평균자책점 2.85, 246탈삼진을 기록하며 다승왕과 탈삼진왕 2관왕에 오르며 팀의 에이스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1940년은 펠러에게 최고의 해였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 코미스키 파크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개막전 노히트 노런 기록이다. 시즌 성적은 27승(26선발승) 11패, 평균자책점 2.61, 261탈삼진으로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부문 모두 아메리칸 리그 1위를 차지하며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1941년에도 펠러의 활약은 이어졌다. 무려 343이닝을 던지며 25승(모두 선발) 13패, 평균자책점 3.15, 260탈삼진을 기록, 3년 연속 다승왕과 4년 연속 탈삼진왕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펠러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잠시 선수 생활을 중단했지만, 복귀 후에도 인디언스에서만 18시즌을 뛰며 통산 266승, 2581탈삼진을 기록했다. 아메리칸 리그 탈삼진왕 7회, 노히터 3회 외에도 1안타 경기를 12번이나 달성했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 최다 기록이다.
2. 3. 군 복무와 참전
1941년 시즌이 끝나고 연봉 협상을 위해 이동하던 중, 밥 펠러는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진주만 공습 소식을 접했다.[105] 그는 즉시 차를 돌려 미국 해군에 자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행크 그린버그에 이어 메이저 리그 선수로는 두 번째 자원 입대였다. 당시 펠러는 암으로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역이 면제된 상태였으나, 국가를 위해 스스로 입대를 선택했다.[106]펠러는 해군에 입대하여 전함 앨라배마 호(USS Alabama)에서 40mm 대공포 사수(나중에는 대공포 부대 치프)로 복무했다.[106]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최전선에서 활약했는데, 북해에서는 나치 독일의 U-보트와 맞섰고, 태평양 전쟁에서는 일본 제국 함대와 싸웠다. 특히 마셜 제도 전투, 괌 상륙작전, 도쿄 공습 등 여러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 이는 당시 조 디마지오처럼 후방에서 위문 공연을 하거나 비교적 안전한 임무를 맡았던 다른 유명 메이저 리그 선수들과는 대조적인 행보였다.
1945년 추축국이 패망하며 전쟁이 끝나자, 펠러는 5개의 종군 휘장과 8개의 무공 훈장을 받고 1945년 8월 22일 제대했다. 제대 후 클리블랜드로 돌아온 그는 8월 24일 카터 호텔에서 열린 시민 오찬 행사에서 영예를 안았으며, 1,000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진정한 영웅들은 집에 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다.[8][34] 같은 날 시에서 열린 퍼레이드에 참여한 후, 인디언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팀의 4–2 승리에 기여했다.[8] 펠러는 1945년 시즌 남은 기간 동안 9경기에 출전하여 5승 3패, 59탈삼진, 평균자책점 2.50을 기록했다.[40] 많은 야구 역사학자들은 펠러가 군 복무로 인한 4년간의 공백이 없었다면 통산 350승과 3,000탈삼진 이상을 달성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106]
2. 4.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복귀
1945년 8월 22일 제대한 밥 펠러는 곧바로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복귀했다. 3년이 넘는 공백기를 가졌음에도 1945년 복귀 시즌에 9경기에 등판하여 5승(모두 선발) 3패, 평균자책점 2.50을 기록했으며, 7경기를 완투하는 등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군 복무 중 익힌 슬라이더를 활용했다.복귀 후 첫 풀타임 시즌이었던 1946년에는 26승(모두 선발) 15패, 평균자책점 2.18을 기록하며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했다. 이 시즌에 4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36완투, 10완봉을 달성했고, 371⅓이닝을 던졌다. 특히 4월 30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개인 통산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으며, 시즌 348탈삼진은 월터 존슨 이후 처음 나온 300탈삼진 기록이었다. 이 해 최다승과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했다.
1947년에는 20승(모두 선발) 11패, 평균자책점 2.68, 196탈삼진으로 다시 한번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했지만, 점차 기량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48년에는 19승(모두 선발) 15패, 평균자책점 3.56을 기록했고, 리그 최다인 164탈삼진을 기록하며 팀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2] 시즌 중 기복이 심해 7월 22일에는 9승 12패를 기록하기도 했고, 통산 7번째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나 자신의 성적이 부족하다고 느껴 출전을 고사했다.[8] 하지만 선수 겸 감독이었던 루 부드로는 "펠러와 함께 흥망성쇠를 함께 한다"고 선언하며 그를 계속 기용했고,[8] 펠러는 시즌 막판 10승 3패를 추가하며 시즌을 마쳤다.[40] 인디언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1경기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1920년 이후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
1948년 월드 시리즈의 상대는 내셔널 리그 챔피언 보스턴 브레이브스였다. 펠러는 1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8회 초, 브레이브스의 필 마시가 도루를 시도하는 것을 아웃시킨 것으로 보였지만, 심판 빌 스튜어트는 세이프를 선언했다.[8] 마시는 이후 결승 득점을 올렸고, 펠러는 2피안타 1실점 완투에도 0-1 패전을 기록했다.[51] 훗날 사진 판독 결과 부드로가 마시를 두 발이나 먼저 태그 아웃했음이 드러났으며, 펠러는 "스튜어트만이 그가 세이프라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8] 펠러는 5차전에도 선발 등판했으나, 5⅓이닝 동안 8피안타 7실점으로 부진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2] 이 경기는 클리블랜드 뮤니시펄 스타디움에서 열렸으며, 86,288명의 관중이 모여 당시 야구 역사상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5] 비록 펠러는 월드 시리즈에서 2패만을 기록했지만, 동료 투수 밥 레몬의 활약 덕분에 인디언스는 4승 2패로 팀 역사상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52] 우승 퍼레이드 후 펠러는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좋은 일"이라고 소감을 밝혔다.[52]

펠러는 강속구를 주무기로 삼았는데, 1940년대 말 메이저 리그 복귀 후, 시즌 전 홈 플레이트 크기의 강철 상자를 향해 던지는 테스트에서 마운드 위 스파이크를 신고 던진 공이 시속 98.6mph를 기록하기도 했다.
1949년에는 15승(12선발) 14패, 평균자책점 3.75, 1950년에는 16승(모두 선발) 11패, 평균자책점 3.43을 기록하며 하향세를 보였다. 하지만 1951년에는 22승(모두 선발) 8패, 평균자책점 3.50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6번째이자 마지막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같은 해 7월 1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개인 통산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1952년에는 9승(모두 선발) 13패, 평균자책점 4.74에 그쳐 풀타임 선발 등판 11시즌 만에 처음으로 10승 달성에 실패하고 5할 미만 승률을 기록했다. 1950년대에는 밥 레몬, 얼리 윈, 마이크 가르시아와 함께 '빅 포(Big Four)'로 불린 강력한 선발 로테이션을 형성했다. 1954년 팀은 막강 타선을 바탕으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기량이 쇠퇴한 펠러(시즌 13승)는 월드 시리즈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다. 팀은 윌리 메이스가 이끄는 뉴욕 자이언츠에게 4전 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1955년 36세가 된 펠러는 선발진에서 밀려났고, 이후 2년간 5승을 더 추가한 뒤 195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통산 성적은 266승(258선발) 162패, 평균자책점 3.25, 3827이닝, 2581탈삼진이다.
한편, 펠러는 현역 시절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 리그 데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로빈슨의 데뷔가 선전 목적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는 실력이 부족하다. 좋은 타자가 되기에는 근육이 너무 많다. 만약 그가 백인이었다면 스카우트가 그를 선택했을까"라고 말하며 인종적 편견을 내비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 5. 선수 생활 말년과 은퇴
1949년 시즌을 시작하며 펠러는 연봉 삭감을 감수하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개막전에 등판했으나, 경기 중 어깨 부상을 당해 4월 한 달을 결장했다. 시즌 나머지 기간 동안 성적이 좋지 않아 15승 14패, 평균자책점 3.75로 마쳤다.[2] 1950년 시즌 전에는 구단에 스스로 연봉 삭감을 제안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단장 행크 그린버그는 펠러가 허용된 최대치(25%)보다 더 많은 삭감을 제안했다고 밝혔다.[53]
같은 해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통산 200승을 달성한 53번째 투수가 되었다.[5] 선수들은 그의 구속이 돌아왔다고 평했지만, 그는 힘보다는 기교로 승부하며 다시 효과적인 투구를 보였고, 시즌을 16승, 평균자책점 3.43으로 마쳤다.[2]
1951년 7월 1일, 펠러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통산 세 번째 노히터를 달성했다.[42] 그는 경기 후 "슬라이더에 의존했고, 7회쯤 되어서야 노히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54] 이로써 그는 래리 코코런과 사이 영에 이어 메이저 리그 역사상 세 번의 노히트를 기록한 세 번째 투수가 되었다.[54] 8월 21일 워싱턴 세네터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1951년 시즌 20승 고지에 가장 먼저 도달했다.[55] 얼 윈, 마이크 가르시아와 함께 펠러는 시즌 20승을 달성했는데, 이는 1931년 이후 처음으로 같은 팀 선발진에서 세 명의 20승 투수가 나온 사례였다.[5] 당시 클리블랜드 선발진은 매우 강력하여, 밥 레몬의 17승 시즌은 그가 8년 동안 유일하게 20승을 거두지 못한 해였다.[56] 펠러는 1951년 22승 8패를 기록하며, 승수와 승률(.733) 모두 아메리카 리그 1위를 차지했고, ''스포팅 뉴스'' 올해의 투수로 선정되었다.[57]
그러나 1952년 시즌은 첫 5번의 선발 등판에서 3승을 거두며 시작했지만, 이후 부진했다. 4월 23일 밥 케인을 상대로 한 1안타 패전 경기는 상대 투수 케인 역시 1안타만 허용한 진기록이었다. 8월 말 스트라이크 판정에 항의하다 알 로페즈 감독에 의해 시즌 아웃 조치를 당했고,[2] 최종 성적은 9승 13패, 평균자책점 4.74였다.[40] 이듬해인 1953년에는 로페즈 감독이 등판 간격을 더 늘려주면서 25번의 선발 등판에서 10승 7패로 성적이 다소 향상되었다.[2]
1954년 인디언스는 정규 시즌에서 111승을 거두며 1927년 뉴욕 양키스가 세운 아메리카 리그 기록을 경신했다.[5] 당시 35세였던 펠러는 13승 3패를 기록했고, 5월 23일 승리로 통산 250승, 6월 12일 승리로 통산 2,500번째 탈삼진을 달성하는 등 개인적인 기록도 세웠다.[5] 그러나 인디언스는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4경기 만에 스윕 패배를 당했다. 1948년 월드 시리즈와 달리 펠러는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알 로페즈 감독은 이에 대해 "펠러는 월드 시리즈에서 선발 등판하고 싶어했지만... 우리가 뉴욕 원정 1, 2차전 중 한 경기라도 이겼다면 클리블랜드에서 열리는 4차전에 그를 선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기에 굳이 그를 등판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그는 당시 팀의 5선발이었고, 예전의 펠러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58]
1955년 펠러는 시즌 일부를 선발 투수로 뛰다가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이동했으며, 25번의 등판에서 4승 4패를 기록했다.[40] 오프 시즌에는 오하이오 다임스 행진의 회장을 맡았고, 아메리카 리그 선수 대표로서 내셔널 리그 대표 로빈 로버츠와 함께 선수 중재 및 연금 문제를 논의하며 이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 설립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2]
1956년 시즌, 펠러는 4경기에 선발 등판하고 15경기에 구원 등판하여 0승 4패, 통산 최악의 평균자책점 4.97을 기록했다.[40] 인디언스는 9월 9일에 "밥 펠러의 밤" 행사를 열었고, 그는 9월 30일 마지막 메이저 리그 경기에 등판했다.[5] 시즌 후 그의 은퇴 여부에 대한 추측이 나왔다.[59] 1956년 12월, 펠러는 크리스마스 전에 행크 그린버그 단장과 상의하여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밝혔다.[60] 그린버그는 펠러에게 방출 또는 구단 프런트 오피스 직책을 제안하며 구단에 항상 그를 위한 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60] 12월 28일, 펠러는 보험 판매업을 계속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61] 그는 "다른 팀에서 뛸 수도 있었지만, 지난 20년간 클리블랜드에서 거둔 성공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라며, "언젠가는 내려야 할 결정이었다"고 덧붙였다.[62]
그는 18시즌 동안 인디언스에서만 뛰었으며, 1950년대 인디언스 선발 로테이션에서 밥 레몬, 얼 윈, 마이크 가르시아와 함께 "빅 4"의 일원이었다. 펠러는 놀란 라이언과 함께 12번의 1안타 경기로 메이저 리그 공동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21세 이전에 20승 이상을 거둔 최초의 투수였다.[42] 그는 통산 266승, 2,581탈삼진, 279완투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통산 7번의 탈삼진 1위, 4번의 볼넷 1위를 기록했다.[40] 은퇴 당시 그는 월터 존슨과 사이 영에 이어 통산 탈삼진 3위였으며,[63] 통산 최다 볼넷(1,764개) 기록과 20세기 한 시즌 최다 볼넷 기록(1938년 208개)을 보유하고 있었다.[64] 인디언스는 1956년 12월 27일에 그의 등번호 19번을 영구 결번했다.[65]
타자로서 펠러는 통산 타율 .151 (1282타수 193안타), 99득점, 2루타 28개, 3루타 13개, 홈런 8개, 99타점, 100볼넷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963의 수비율을 기록했다.[40]
1962년 펠러는 재키 로빈슨과 함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두 사람 모두 1936년 첫 헌액 이후 첫 투표에서 헌액된 최초의 인물이었다.[47] 헌액 당시, 타이 콥(98.2%), 베이브 루스(95.1%), 호너스 와그너(95.1%)만이 그보다 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2010년, 펠러가 호스피스에 입원한 후, 한 기자가 2007년 노령의 펠러와의 인터뷰를 회상하며, 펠러가 로빈슨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언급하는 기사를 공개했다. 펠러는 "재키 로빈슨에 대한 과대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주자였습니다. 그는 괜찮은 타자였습니다. 그는 평범한 2루수였습니다. 그는 래리 도비만큼 훌륭한 야구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재키 로빈슨보다 훨씬 뛰어난 흑인 야구 선수들이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다.[66]
2. 6. 은퇴 이후
1957년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펠러는 선수 경력 동안 비시즌마다 미국 전역을 돌며 메이저 리그 선수들을 처음 보는 도시에서 전시 경기를 펼쳤다. 그의 전시 투어에는 종종 다른 메이저 리거들과 새첼 페이지와 같은 니그로 리그 선수들이 참여했으며,[67] 스탠 뮤지얼, 미키 버논, 제프 히스 등도 함께했다.[68] 1945년 투어 중에는 재키 로빈슨과 대결하기도 했는데, 당시 로빈슨이 메이저 리그 투수를 상대로 성공하기에는 너무 근육질이라고 평가했지만 로빈슨은 펠러를 상대로 2안타를 기록했다.[10][69][70] 선수들은 전시 경기에 참여하기 전에 야구 커미셔너 해피 챈들러에게 통보해야 했으며, 펠러는 경기 수 제한에 이의를 제기하고 증가를 제안하여 커미셔너의 동의를 얻었다.[71] 펠러는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1947년에는 더글러스 DC-3 비행기를 이용하기도 했다.[72] 이러한 번스토밍(barnstorming) 사업 감각과 광고 계약은 그를 당시 가장 부유한 선수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펠러는 비시즌 전시 경기가 가족의 의료비와 제2차 세계 대전 해군 복무로 인해 놓친 수입(12.5만달러 이상)을 충당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6][76] 또한, 펠러의 전기 작가 존 시켈스는 펠러가 흑인 선수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평가하며, 이러한 전시 경기가 니그로 리그 선수들의 실력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고 보았다.[77]
1947년 펠러는 쿠바 윈터 리그에서 뛰려 했으나, 커미셔너 챈들러는 메이저 리거의 쿠바 리그 참가를 금지했다.[73] 펠러는 쿠바 리그 수익을 선수 연금 기금에 기부하겠다며, 선수들이 원하는 곳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을 강조했다.[74] 그는 미국 선수는 뛸 수 없는데 라틴 아메리카 선수들은 허용되는 것이 "심히 불공평"하다고 믿었다.[75]
펠러는 195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MLBPA)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86] 미국 의회에 출석하여 야구의 보류 조항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87][88] 그는 선발 투수로서 구단과 경기 수입을 공유하는 계약을 최초로 맺었으며, 선수 최초로 자신을 법인화(Ro-Fel, Inc.)하기도 했다.[77][89] 또한 FA(자유 계약 선수) 권리를 위해 초기에 노력한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77]

2001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창단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는 홈구장 프로그레시브 필드를 방문하여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2006년에는 인디언스 스프링캠프를 찾아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펠러는 야구 기념품 컨벤션에서 사인회를 연 최초의 야구 스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매우 자주 참석하여 ESPN 기자는 그가 다른 누구보다 많은 사인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91][92] 1990년에는 미국 업적 아카데미로부터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다.[93] 2009년 6월, 90세의 나이로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열린 초대 야구 명예의 전당 클래식의 선발 투수로 나서기도 했다.[94] 1977년에는 일본을 방문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야자키 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107]

펠러는 첫 번째 아내 버지니아 윈터(Virginia Winther)와의 사이에 세 아들 스티브(Steve), 마틴(Martin), 브루스(Bruce)를 두었다. 부부는 1971년 이혼했으며, 버지니아는 1981년 5월 6일 오하이오주 셰이커 하이츠 자택에서 사망했다.[90] 이후 펠러는 두 번째 아내 앤 토프(Anne Thofe)와 함께 클리블랜드 교외인 오하이오주 게이츠 밀스에서 살았다.[2]
2010년 8월 백혈병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으며,[95] 10월에는 심장 박동 조율기 삽입 수술을 받고 폐렴과 칸디다증 진단도 받았다. 12월 8일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호스피스 치료로 전환되었고,[96] 2010년 12월 15일, 백혈병 합병증으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0][108] 펠러 사망 당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영구 결번 선수 중 생존자는 없었으며, 이 상태는 2017년 프랭크 로빈슨의 등번호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될 때까지 이어졌다.
3. 사망
2009년 11월, 폐렴 증세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상태가 위독해져 2010년 10월 클리블랜드의 호스피스로 옮겨졌으나, 2010년 12월 15일 백혈병으로 인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110]
4. 선수로서의 특징
펠러는 "불덩이 투수"라는 별명처럼 매우 빠른 강속구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1936년 스프링캠프에서 16세의 나이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강타선을 상대로 3이닝 8탈삼진을 기록하며 주목받았고, 같은 해 정규 시즌 데뷔전에서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15탈삼진,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를 상대로는 당시 메이저 리그 한 경기 최다 기록인 17탈삼진을 기록하며 강속구 투수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38년 만 19세의 나이로 풀타임 선발 투수가 된 펠러는 그해 240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이후 7시즌 연속 아메리칸 리그 탈삼진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의 시작을 알렸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한 경기 18탈삼진이라는 메이저 리그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제구력에 약점을 보여 그해 무려 208개의 볼넷을 허용, 메이저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단일 시즌 200볼넷 이상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다.[64] 이후 펠러는 제구력 향상에 집중하며 점차 안정감을 찾아갔다.
1940년에는 27승, 261탈삼진, 평균자책점 2.61을 기록하며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특히 그해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개막전에서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개막전 노히트 노런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42] 1941년까지 5시즌 연속으로 아메리칸 리그 다승과 탈삼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다.
통산 세 차례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으며,[42] 놀란 라이언과 함께 역대 최다인 12번의 1안타 경기를 기록하기도 했다.[42] 또한 21세 이전에 20승 이상을 거둔 최초의 투수이기도 하다.[42]
펠러는 삼진을 많이 잡는 투수였지만, 동시에 많은 볼넷을 내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통산 1,764개의 볼넷은 은퇴 당시 메이저 리그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64] 또한 왼발을 크게 들어 올리는 독특한 투구 폼 때문에 주자의 도루를 쉽게 허용하는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17탈삼진 경기에서는 9개의 볼넷과 함께 9개의 도루를 허용하기도 했다.[109]
커리어 후반에는 구속이 줄어들었지만,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종을 활용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교적인 투구를 통해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1951년에는 통산 세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 그해 22승으로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과 승률 1위를 차지하며 ''스포팅 뉴스'' 올해의 투수상을 수상했다.[57]
통산 18시즌 동안 266승, 2,581탈삼진, 279완투를 기록했다.[40] 탈삼진 부문에서는 7번, 볼넷 부문에서는 4번 아메리칸 리그 1위를 차지했다.[40]
4. 1. 투구 구종
"불덩이 투수"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강속구를 던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MLB 커미셔너 사무국이 펠러의 강속구를 촬영하여 구속을 측정한 결과, 약 167.37km로 측정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펠러는 이때 수트 차림으로 마운드가 아닌 평지에서 던졌다. 또한 1946년 그리피스 스타디움에서 미국군이 협력하여 당시 최신 구속 측정기를 사용한 실험에서는, 초속 약 188.61km, 종속 약 158.68km, 평균 시속 약 173.65km를 기록했다고 한다. 당시 펠러의 강속구를 가까이에서 본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현재의 측정 방법에 환산하여 대략 160km/h 정도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펠러도 자신의 강속구 속도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997년 월드 시리즈에서 롭 넨이 약 164.15km를 기록했을 때, 펠러는 "그것은 나의 체인지업 숫자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새첼 페이지에 대해 "새첼이 던지는 공이 패스트볼이라면, 내가 던지는 공은 체인지업이다"라고 자주 말했다.
투수로서의 구종은 1942년경까지는 주로 강속구와 커브를 사용했다. 커리어 후반에는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추가하여 던졌다. 투구 폼은 오버핸드였다. (미국 서적 『guide to pitchers』 참고)
5. 유산과 영향
밥 펠러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특히 그의 강력한 패스트볼과 압도적인 탈삼진 능력은 1940년대 야구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그의 선수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인해 4년 가까이 중단됐지만, 전쟁 후 복귀해서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과 영향 ==
1941년 시즌 종료 후,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들은 펠러는 미국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이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행크 그린버그에 이어 두 번째로 군에 입대한 메이저 리그 선수였다. 당시 펠러는 가족 부양 의무로 징집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자발적으로 입대를 선택했다.[30][6] 이는 그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펠러는 전함 앨러배마 호에서 대공포 사수로 복무하며 북대서양에서는 나치 독일의 잠수함과 싸웠고, 태평양 전쟁에서는 일본 함대와 맞섰다.[33] 마셜 제도 전투, 괌 상륙작전, 도쿄 공습 등 수많은 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이는 조 디마지오와 같이 후방에서 위문 공연 등을 했던 다른 유명 선수들과 달리, 펠러가 최전선에서 싸웠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는다.[32]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펠러는 5개의 종군 휘장과 8개의 무공 훈장을 받고 선임 부사관으로 제대했다.[8]
군 복무로 인한 4년 가까운 공백은 그의 통산 기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펠러 스스로도 군 복무가 아니었다면 최소 100승 이상을 더 거두어 통산 350승 이상, 3,800개 이상의 탈삼진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78][79] 그는 "해군에서 4시즌을 보내지 않았다면 300승보다는 400승에 훨씬 더 가까이 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평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 무사히 집에 돌아와서 기쁘다"고 말했다.[10]
== 선수 권익 보호 노력 ==
펠러는 선수들의 권익 향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5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MLBPA)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86] 야구의 보류 조항 문제에 대해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는 등 선수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87][88] 또한, 선수로서는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딴 법인(Ro-Fel, Inc.)을 설립했고,[77][89] 선수들이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얻을 권리를 위해 노력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77]
== 번스토밍 투어와 인종 통합 기여 ==
펠러는 비시즌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며 번스토밍 투어를 진행했다. 이 투어에는 새첼 페이지와 같은 니그로 리그의 스타 선수들이 함께 참여했고,[67] 이는 당시 인종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야구계에서 흑인 선수들의 뛰어난 실력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펠러의 전기 작가 존 시켈스는 "그 전시 경기가 사람들이 니그로 리그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 선수들만큼이나 훌륭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왔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했다.[77] 1945년 투어 중에는 메이저 리그와 계약한 재키 로빈슨과 맞대결하기도 했다.[10][69] 이러한 활동은 야구의 인종 통합 과정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평가와 명예 ==
펠러는 당대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았다. 그의 패스트볼은 전설적인 속도를 자랑했고, 여러 차례 비공식적인 측정을 통해 시속 100mph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3][6][19][80][1][81] 동시대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인 테드 윌리엄스는 펠러를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가 투구하기 3일 전부터 나는 로버트 펠러, 밥 펠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정말 좋았다."[6]
펠러는 통산 266승, 2,581탈삼진, 3번의 노히트 노런, 12번의 1안타 경기를 기록했다.[40][42] 그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1962년 재키 로빈슨과 함께 첫 투표에서 헌액됐고,[4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그의 등번호 19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65] 1999년 ''더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목록에서 36위에 올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의 최종 후보이기도 했다.[84]
다만, 펠러는 말년에 재키 로빈슨에 대해 "과대평가되었다"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는 로빈슨이 훌륭한 주자였지만 타격과 수비는 평범했으며, 래리 도비를 포함해 로빈슨보다 뛰어난 흑인 선수들이 많았다고 주장했다.[66]
== 기념 ==
펠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아이오와주 밴미터에 1995년 밥 펠러 박물관이 개관했다.[99] 이 박물관에는 펠러 관련 기념품과 개인 소장품이 전시됐으나, 재정 문제로 2015년 밴미터 시청으로 용도가 변경됐고 일부 유물만 전시되고 있다.[101][102] 2013년에는 그의 삶과 가치를 기리는 밥 펠러 용기 훈장이 제정됐다.[103]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2010년 팀의 '올해의 선수상' 명칭을 '밥 펠러 올해의 선수상'으로 변경해 그를 기리고 있다.[97]
6. 기록
193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입단했을 당시 16살의 고등학생 신분이었던 펠러는 스프링캠프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3이닝 동안 8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강속구 투수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시즌 데뷔전에서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15개의 삼진을 기록했고, 필라델피아 어슬레틱스를 상대로는 디지 딘이 보유했던 메이저 리그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17개)과 타이를 이루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37년에는 간간히 선발로 등판하여 9승(7선발승)을 거두었고, 1938년부터는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해 17승(11패, 평균자책점 4.08)과 240탈삼진을 기록하며 7시즌 연속 탈삼진왕의 시작을 알렸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18탈삼진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신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동시에 208개의 볼넷을 허용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200볼넷 이상을 기록한 투수가 되기도 했다. 이후 펠러는 제구력 향상에 집중하며 점차 안정감을 찾아갔다.
1939년에는 24승(23선발승) 9패, 평균자책점 2.85, 246탈삼진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1940년에는 27승(26선발승) 11패, 평균자책점 2.61, 261탈삼진으로 투수 삼관왕에 올랐다. 특히 1940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개막전에서는 코미스키 파크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는데, 이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개막전 노히트 노런 기록이다.
1941년에도 343이닝을 던지며 25승(모두 선발) 13패, 평균자책점 3.15, 260탈삼진을 기록, 5시즌 연속 다승 및 탈삼진 1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해군에 복무하며 노퍽 해군 기지 블루재킷츠[35][36]와 해군 기지 그레이트 레이크스 야구팀에서 투수로 활동했다.[37][38][39]
1948년, 인디언스는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보냈으나 펠러 개인에게는 기복이 심한 해였다. 통산 7번째로 올스타에 선정되었지만, 스스로의 경기력이 부족하다고 느껴 출전을 고사했다.[8] 한때 한 달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7월 22일 기준 9승 12패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선수 겸 감독이었던 루 부드로는 "펠러와 함께 흥망성쇠를 함께 한다"며 그를 계속 기용했다.[8] 펠러는 남은 시즌 동안 10승 3패를 추가하며 최종 19승 15패, 리그 1위인 164탈삼진, 평균자책점 3.56으로 시즌을 마쳤다.[40] 인디언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단판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1920년 이후 처음으로 아메리카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2]
펠러는 내셔널 리그 챔피언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1948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8회 초, 브레이브스의 필 마시가 도루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아웃으로 보였으나 심판 빌 스튜어트는 세이프를 선언하는 오심 논란이 있었다.[8] 마시는 이후 결승 득점을 올렸고, 펠러는 2피안타 완투에도 불구하고 1-0으로 패배했다.[51] 펠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스튜어트만이 그가 세이프라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8] 5차전에도 선발 등판했으나 7회에 강판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이 경기는 클리블랜드 뮤니시펄 스타디움에서 열렸으며, 86,288명의 관중이 모여 당시 야구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을 세웠다.[5] 인디언스는 6차전에서 승리하며 팀 역사상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펠러는 우승 퍼레이드 후 "대통령이 되는 것만큼 좋은 일"이라고 소감을 밝혔다.[52] 이후 선수 생활 후반기와 은퇴, 통산 기록 및 수상 내역 등은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룬다.
6. 1. 통산 성적
1949 시즌을 시작하면서 펠러는 연봉 삭감을 감수하고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를 상대로 개막전에 등판했다. 경기 중 어깨 부상을 당해 4월 한 달을 결장했다. 시즌 나머지 기간 동안 그의 성적은 좋지 않았고, 시즌을 15승 14패, 평균자책점 3.75로 마쳤다.[2] 1950 시즌 전, 펠러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단에 연봉 삭감을 제안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인디언스 단장 행크 그린버그는 "그가 직접 제안을 했습니다. 사실, 그는 허용된 최대 25%보다 더 많은 삭감을 제안했습니다.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밥이 어제 나타난 후 우리는 그 금액에 대해 빠르게 동의했습니다."[53] 더블헤더 두 번째 경기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펠러는 통산 200승을 달성한 53번째 투수가 되었다.[5] 그 해 선수들은 그의 구속이 돌아왔다고 언급했고, 파워보다는 기교로 승리하며 그는 다시 효과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6승, 평균자책점 3.43으로 시즌을 마쳤다.[2]
1951년 7월 1일, 펠러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상대로 통산 세 번째 노히터를 기록했다.[42] 펠러는 "슬라이더에 의존했고, 7회쯤 되어서야 노히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 타자에 집중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음속으로 억제하려고 했다."라고 말했다.[54] 펠러는 래리 코코런과 사이 영에 이어 통산 세 번의 노히트를 기록한 세 번째 투수가 되었다.[54] 그는 8월 21일 워싱턴 세네터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1951 시즌 20승을 달성한 첫 번째 투수가 되었다.[55] 얼 윈과 마이크 가르시아와 함께 펠러는 시즌 20승 고지를 밟았다. 1931년 이후 같은 선발진에서 20승을 거둔 투수 3인조는 처음이었다.[5] 클리블랜드의 선발 로테이션은 매우 강력해서, 밥 레몬의 17승은 8년 동안 20승을 거두지 못한 유일한 해였다.[56]
펠러는 1951년 22승 8패를 기록하며, 승수와 승률(.733) 모두 아메리카 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는 ''스포팅 뉴스'' 올해의 투수로 선정되었다.[57]
펠러는 1952 시즌을 첫 5번의 선발 등판에서 3승으로 시작했다. 패배 중 하나는 4월 23일 밥 케인을 상대로 한 1안타 경기로, 케인 역시 단 1개의 안타만 허용했다. 펠러는 시즌 나머지 기간 동안 고전했고, 8월 말 스트라이크 콜에 대한 심판과의 논쟁 후, 알 로페즈 감독은 펠러를 시즌 아웃시켰다.[2] 9승 13패, 평균자책점 4.74로 시즌을 마감했다.[40] 이듬해에는 로페즈가 그에게 등판 간격을 더 많이 주면서 25번의 선발 등판에서 10승 7패로 성적이 향상되었다.[2] 인디언스는 1954년 정규 시즌에서 111승을 거두며, 1927년 뉴욕 양키스가 보유한 아메리카 리그 기록을 깼다.[5] 35세의 펠러는 그 해 13승 3패를 기록했고, 5월 23일 승리로 통산 250승을 달성했으며, 6월 12일 승리로 통산 2,500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다.[5]
인디언스는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로 4경기에서 스윕을 당했다. 1948년 시리즈와 달리, 펠러는 등판하지 않았다. 인디언스 감독 알 로페즈는 펠러를 선발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 "펠러는 1954년 월드 시리즈에서 경기에 한 번은 선발로 나가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인디언스는 뉴욕 자이언츠에게 스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뉴욕에서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경기에서 이겼다면, 네 번째 경기에서 펠러를 클리블랜드에서 선발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뉴욕에서 어떤 경기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굳이 펠러를 등판시킬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는 당시 팀의 5선발이었고, (경력 초기에) 펠러가 아니었습니다."[58] 1955년, 펠러는 시즌의 일부를 선발 투수로 보냈고, 시즌 후반에는 불펜으로 이동했다. 그는 25번의 등판에서 4승 4패를 기록했다.[40] 오프 시즌 동안 그는 오하이오 다임스 행진의 회장이 되었고, 아메리카 리그의 선수 대표로 활동했다. 그는 오프 시즌 동안 내셔널 리그 대표 로빈 로버츠와 함께 선수 중재와 야구 구단주와의 연금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고, 이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 회장이 되었다.[2]
1956 시즌, 펠러는 4경기에 선발 등판하고 15경기에 더 출전하여 0승 4패, 통산 최악의 평균자책점 4.97을 기록했다.[40] 인디언스는 9월 9일에 "밥 펠러의 밤"을 개최했고, 그는 9월 30일에 마지막 메이저 리그 경기에 출전했다.[5] 시즌 후, 펠러의 선수 은퇴 여부에 대한 추측이 나왔다.[59] 1956년 12월, 펠러는 ''더 플레인 딜러''에 "이번 주 말 클리블랜드로 돌아가 크리스마스 전에 행크 그린버그와 상의할 계획입니다. 그때 결정을 내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60] 그린버그는 펠러에게 방출 또는 인디언스 구단의 프런트 오피스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린버그는 "우리는 펠러가 우리와 함께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에게는 밥을 위해 클리블랜드 구단에 항상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60] 12월 28일, 펠러는 보험 판매를 계속하기 위해 인디언스에서 공식적으로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61] 은퇴를 발표하면서 펠러는 "다른 몇몇 구단과 함께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과 함께했을 때의 성과는 지난 20년간 클리블랜드 구단에서 거둔 성공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만약 내가 1년을 더 던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지금 내리고 있는 결정을 언젠가는 내려야 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6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1956년 12월 27일에 그의 등번호 19번을 영구 결번했다.[65]
그는 18시즌 동안 인디언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50년대 인디언스 선발 로테이션에서 밥 레몬, 얼 윈, 마이크 가르시아와 함께 "빅 4" 중 한 명이었다. 펠러는 놀란 라이언과 함께 12번의 1안타 경기로 메이저 리그 기록을 공유하고 있으며, 21세 이전에 20승 이상을 거둔 최초의 투수였다.[42] 그는 266승, 2,581개의 탈삼진, 279개의 완투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그의 통산 7번의 탈삼진, 4번의 볼넷으로 아메리카 리그를 이끌었다.[40] 은퇴 당시 펠러는 월터 존슨과 사이 영에 이어 통산 탈삼진 3위였으며,[63] 통산 최다 볼넷 기록(1,764개)을 보유했고, 20세기의 한 시즌 최다 볼넷 기록(1938년 208개)을 가지고 있다.[64]
타자로서 펠러는 .151의 타율(193-for-1282)을 기록했고, 99 득점, 28개의 2루타, 13개의 3루타, 8개의 홈런, 99 타점, 100개의 볼넷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963의 수비율을 기록했다.[40]
1962년 펠러는 재키 로빈슨과 함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두 사람 모두 1936년 첫 헌액 이후 첫 투표에서 헌액된 최초의 인물이었다.[47] 헌액 당시, 타이 콥(98.2%), 베이브 루스(95.1%), 호너스 와그너(95.1%)만이 그보다 더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2010년, 펠러가 호스피스에 입원한 후, 한 기자가 2007년 노령의 펠러와의 인터뷰를 회상하며, 펠러가 로빈슨에 대한 솔직한 평가를 언급하는 기사를 공개했다. 펠러는 "재키 로빈슨에 대한 과대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주자였습니다. 그는 괜찮은 타자였습니다. 그는 평범한 2루수였습니다. 그는 래리 도비만큼 훌륭한 야구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재키 로빈슨보다 훨씬 뛰어난 흑인 야구 선수들이 많았습니다."라고 말했다.[66]
연도 | 소속팀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세이브 | 승 | 패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
1936 | CLE | 14 | 8 | 5 | 0 | -- | 5 | 3 | 1 | -- | .625 | 279 | 62.0 | 52 | 1 | 47 | -- | 4 | 76 | 8 | 3 | 29 | 23 | 3.34 | 1.60 |
1937 | 26 | 19 | 9 | 0 | -- | 9 | 7 | 1 | -- | .563 | 651 | 148.2 | 116 | 4 | 106 | -- | 2 | 150 | 5 | 2 | 68 | 56 | 3.39 | 1.49 | |
1938 | 39 | 36 | 20 | 2 | -- | 17 | 11 | 1 | -- | .607 | 1248 | 277.2 | 225 | 13 | 208 | -- | 7 | 240 | 5 | 1 | 136 | 126 | 4.08 | 1.56 | |
1939 | 39 | 35 | 24 | 4 | -- | 24 | 9 | 1 | -- | .727 | 1243 | 296.2 | 227 | 13 | 142 | -- | 3 | 246 | 14 | 1 | 105 | 94 | 2.85 | 1.24 | |
1940 | 43 | 37 | 31 | 4 | -- | 27 | 11 | 4 | -- | .711 | 1304 | 320.1 | 245 | 13 | 118 | -- | 5 | 261 | 8 | 0 | 102 | 93 | 2.61 | 1.13 | |
1941 | 44 | 40 | 28 | 6 | -- | 25 | 13 | 2 | -- | .658 | 1466 | 343.0 | 284 | 15 | 194 | -- | 5 | 260 | 6 | 0 | 129 | 120 | 3.15 | 1.39 | |
1945 | 9 | 9 | 7 | 1 | -- | 5 | 3 | 0 | -- | .625 | 300 | 72.0 | 50 | 1 | 35 | -- | 2 | 59 | 1 | 0 | 21 | 20 | 2.50 | 1.18 | |
1946 | 48 | 42 | 36 | 10 | -- | 26 | 15 | 4 | -- | .634 | 1512 | 371.1 | 277 | 11 | 153 | -- | 3 | 348 | 3 | 0 | 101 | 90 | 2.18 | 1.16 | |
1947 | 42 | 37 | 20 | 5 | -- | 20 | 11 | 3 | -- | .645 | 1218 | 299.0 | 230 | 17 | 127 | -- | 4 | 196 | 7 | 2 | 97 | 89 | 2.68 | 1.19 | |
1948 | 44 | 38 | 18 | 2 | -- | 19 | 15 | 3 | -- | .559 | 1186 | 280.1 | 255 | 20 | 116 | -- | 2 | 164 | 2 | 0 | 123 | 111 | 3.56 | 1.32 | |
1949 | 36 | 28 | 15 | 0 | -- | 15 | 14 | 0 | -- | .517 | 894 | 211.0 | 198 | 18 | 84 | -- | 1 | 108 | 3 | 1 | 104 | 88 | 3.75 | 1.34 | |
1950 | 35 | 34 | 16 | 3 | -- | 16 | 11 | 0 | -- | .593 | 1055 | 247.0 | 230 | 20 | 103 | -- | 5 | 119 | 3 | 0 | 105 | 94 | 3.43 | 1.35 | |
1951 | 33 | 32 | 16 | 4 | -- | 22 | 8 | 0 | -- | *.733 | 1061 | 249.2 | 239 | 22 | 95 | -- | 7 | 111 | 2 | 0 | 105 | 97 | 3.50 | 1.34 | |
1952 | 30 | 30 | 11 | 0 | -- | 9 | 13 | 0 | -- | .409 | 869 | 191.2 | 219 | 13 | 83 | -- | 3 | 81 | 1 | 1 | 124 | 101 | 4.74 | 1.58 | |
1953 | 25 | 25 | 10 | 1 | -- | 10 | 7 | 0 | -- | .588 | 721 | 175.2 | 163 | 16 | 60 | -- | 3 | 60 | 1 | 1 | 78 | 70 | 3.59 | 1.27 | |
1954 | 19 | 19 | 9 | 1 | 1 | 13 | 3 | 0 | -- | .813 | 580 | 140.0 | 127 | 13 | 39 | -- | 3 | 59 | 0 | 0 | 53 | 48 | 3.09 | 1.19 | |
1955 | 25 | 11 | 4 | 2 | 0 | 4 | 4 | 0 | -- | .500 | 340 | 83.0 | 71 | 7 | 31 | 2 | 1 | 25 | 0 | 0 | 43 | 32 | 3.47 | 1.23 | |
1956 | 19 | 4 | 2 | 0 | 0 | 0 | 4 | 1 | -- | .000 | 253 | 58.0 | 63 | 7 | 23 | 4 | 0 | 18 | 0 | 1 | 34 | 32 | 4.97 | 1.48 | |
MLB: 18년 | 570 | 484 | 279 | 44 | 1 | 266 | 162 | 21 | -- | .621 | 16180 | 3827.0 | 3271 | 224 | 1764 | 6 | 60 | 2581 | 69 | 13 | 1557 | 1384 | 3.25 | 1.32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는 승률 부문 1위
연도 | 구단 | 투수 | |||||
---|---|---|---|---|---|---|---|
경기 | 자 살 | 보 살 | 실 책 | 병 살 | 수비율 | ||
1936 | CLE | 14 | 0 | 5 | 0 | 0 | 1.000 |
1937 | 26 | 0 | 27 | 2 | 1 | .931 | |
1938 | 39 | 8 | 37 | 3 | 1 | .938 | |
1939 | 39 | 8 | 44 | 3 | 2 | .945 | |
1940 | 43 | 5 | 34 | 2 | 2 | .951 | |
1941 | 44 | 12 | 50 | 1 | 1 | .984 | |
1945 | 9 | 7 | 4 | 0 | 0 | 1.000 | |
1946 | 48 | 13 | 47 | 1 | 2 | .984 | |
1947 | 42 | 17 | 50 | 1 | 2 | .985 | |
1948 | 44 | 16 | 39 | 2 | 1 | .965 | |
1949 | 36 | 12 | 19 | 1 | 2 | .969 | |
1950 | 35 | 8 | 23 | 0 | 2 | 1.000 | |
1951 | 33 | 6 | 32 | 2 | 2 | .950 | |
1952 | 30 | 13 | 34 | 3 | 1 | .940 | |
1953 | 25 | 10 | 31 | 0 | 5 | 1.000 | |
1954 | 19 | 7 | 15 | 0 | 2 | 1.000 | |
1955 | 25 | 2 | 11 | 3 | 2 | .813 | |
1956 | 19 | 2 | 8 | 1 | 0 | .909 | |
MLB | 570 | 146 | 510 | 25 | 28 | .963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1942년~1944년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으로 기록 없음
6. 2. 타이틀
타이틀 | 횟수 | 연도 | 비고 |
---|---|---|---|
다승왕 | 6회 | 1939년 ~ 1941년, 1946년 ~ 1947년, 1951년 | 역대 2위 타이 |
최우수 평균자책점 | 1회 | 1940년 | |
탈삼진왕 | 7회 | 1938년 ~ 1941년, 1946년 ~ 1948년 |
6. 3. 수상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62년)[47]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등번호 '''19'''번 영구 결번 지정 (1956년 12월 27일)[65]
- 스포팅 뉴스 선정 "100명의 위대한 야구 선수" 36위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 선정 (1999년)
- 투수 삼관왕: 1회 (1940년)
- MLB 올스타전 선출: 8회 (1938년 ~ 1941년, 1946년 ~ 1948년, 1950년)
- ''스포팅 뉴스'' 올해의 투수: 1회 (1951년)[57]
- 노히트 노런: 3회[42]
- * 1940년 4월 16일, 대 시카고 화이트삭스 전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개막전 노히트 노런)
- * 1946년 4월 30일, 대 뉴욕 양키스 전
- * 1951년 7월 1일, 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전[54]
6. 4. 기타 기록
-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개막전 노히트 노런: 1940년 4월 16일, 코미스키 파크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달성.[42]
- 통산 3회 노히트 노런 달성 (역대 3번째):[54]
- 1940년 4월 16일, 대 시카고 화이트삭스 전
- 1946년 4월 30일, 대 뉴욕 양키스 전
- 1951년 7월 1일, 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전[42]
- 투수 삼관왕: 1회 (1940년)[40]
- 다승 1위: 6회 (1939년, 1940년, 1941년, 1946년, 1947년, 1951년)[40]
- 탈삼진 1위: 7회 (1938년, 1939년, 1940년, 1941년, 1946년, 1947년, 1948년)[40]
- 메이저 리그 단일 시즌 최다 볼넷 기록: 208개 (1938년, 메이저 리그 역사상 최초의 단일 시즌 200볼넷)[64]
- 통산 12번의 1안타 경기 (놀란 라이언과 메이저 리그 공동 1위)[42]
- 21세 이전에 20승 이상을 거둔 최초의 투수[42]
- 통산 기록: 266승, 2,581 탈삼진, 279 완투[40]
- 은퇴 시점 통산 탈삼진 3위 (월터 존슨, 사이 영 다음)[63]
- 은퇴 시점 통산 최다 볼넷 기록 (1,764개)[64]
- MLB 올스타전 선출: 8회 (1938년, 1939년, 1940년, 1941년, 1946년, 1947년, 1948년, 1950년)
- ''스포팅 뉴스'' 올해의 투수: 1회 (1951년)[57]
-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62년, 첫 해 자격)[47]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 등번호 19번 영구 결번 (1956년 12월 27일)[65]

195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 타자 기록: 타율 .151 (193안타/1282타수), 99득점, 282루타, 133루타, 8홈런, 99타점, 100볼넷[40]
- 수비 기록: 수비율 .963[40]
- 1977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야자키 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았다.[107]
- 1962년 명예의 전당 헌액 동기인 재키 로빈슨에 대해 후일 "과대평가되었다"는 견해를 밝혔다. 펠러는 로빈슨이 "훌륭한 주자, 괜찮은 타자, 평범한 2루수"였으며, 래리 도비를 포함해 로빈슨보다 뛰어난 흑인 야구 선수들이 많았다고 언급했다.[66]
'''등번호'''
연도 | 등번호 |
---|---|
1936년 | 9 |
1937년 - 1938년 | 14 |
1939년 - 1941년, 1945년 - 1956년 | 19 (영구 결번) |
참조
[1]
뉴스
Bob Feller, 92, Hall of Famer had blazing fastball
http://www.boston.co[...]
2010-12-16
[2]
서적
Bob Feller: Ace of the Greatest Generation
Potomac Books
[3]
서적
Bob Feller's Little Black Book of Baseball Wisdom
https://archive.org/[...]
Contemporary Books
[4]
서적
Now Pitching, Bob Feller
https://books.google[...]
Kensington Publishing
[5]
서적
The Cleveland Indians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Sports Publishing
[6]
잡지
Rapid Robert Can Still Bring It
2005-08-08
[7]
뉴스
Rob the Cradle? And Why Not?
https://news.google.[...]
1936-12-11
[8]
뉴스
Bob Feller, The Greatest Cleveland Indian, dies at age 92
http://www.cleveland[...]
2010-12-15
[9]
웹사이트
Philadelphia Athletics at Cleveland Indians Box Score, September 13, 1936
https://www.baseball[...]
[10]
뉴스
Bob Feller, Whose Fastball Dazzled, Dies at 92
https://www.nytimes.[...]
2010-12-15
[11]
잡지
Time Magazine Cover: Bob Feller April 19, 1937
https://web.archive.[...]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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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전설' 밥 펠러 별세…향년 9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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